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 영화/역사 (문단 편집) == [[1980년대]] == [[파일:%C0̹%CC%C1%F6_3.jpg|width=100%]] 연도별 관객수(단위 만명). [[1980년대]]는 [[1970년대]]보다도 더 관객수가 없던 시기였다. [[1970년대]]부터 차츰 식어가던 한국 영화계는 [[3S정책]]이라 일컬어지는 [[정부]] 차원의 시장 왜곡으로 더욱 암흑의 시기로 빠져들었다. [[전두환 정부]]는 [[1970년대]]에 비해서 파격적으로 검열을 완화했지만, 이는 오직 노출 수위에서만 그랬고, 정치나 사회, 사상 면에서의 검열은 여전했다. 오히려 정부 차원에서 에로물을 상영하라고 강요하였고, 그랬기 때문에 장르나 관객수에서 오히려 [[1970년대]]보다 더더욱 침체된 시기를 보냈다. 여기다가 [[홍콩 영화]], [[할리우드|헐리우드 영화]] 등 외화 수입의 증가에 따라 대중은 더더욱 국산 영화를 외면하였다. [[1970년대]]에는 그래도 국산 영화가 외산 영화보다 관람수가 많았던 해가 없지 않지만 [[1980년대]]는 단 한 해도 국산 영화의 관객수가 외산 영화의 관객수를 넘은 적이 없다. 국산 영화의 실적은 [[1970년대]]의 국산 영화랑 비교해도 처참할 정도로 떨어져서, [[1970년대]]의 최고 흥행 기록을 깬 영화는 [[장미희]], [[안성기]] 주연의 《[[깊고 푸른 밤]]》뿐으로, 이것마저도 인구 대비 흥행관객수를 비교하면 이전보다도 못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1980년대]]를 통틀어 한국에서 가장 많이 성행한 장르는 바로 [[에로 영화]]였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은 유독 영화에서 성적인 요소에 대한 검열에 관대했는데, 이는 [[3S정책]] 중 [[섹스]]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애마부인]]》을 필두로 여러 에로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표작으로는 [[1980년대]] 최고의 미녀 스타였던 [[정윤희]]가 주연한 정진우 감독의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등이 있었다. [[1980년대]] 당시 에로 영화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으며, 한 예로 [[1982년]] 《[[애마부인]]》이 서울극장에서 처음 개봉했을 때 밀려오는 인파로 인해 극장 매표소의 유리창이 깨질 정도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에로이카로 알려진 [[198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인 [[원미경]], [[이미숙(1960)|이미숙]], [[이보희(배우)|이보희]]가 출연한 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다. 각각 《[[변강쇠(영화)|변강쇠]]》, 《[[뽕(영화)|뽕]]》, 《[[어우동]]》으로 흥행에 성공하였으며, 이보희의 경우 특히 에로물 전담 배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에로물에 출연해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모든 영화인들이 에로티시즘의 트렌드를 따른 것만은 아니었다. 그 선봉에 서 있던 감독은 [[임권택]]으로, [[1970년대]] 내리 [[반공]], [[반일]]을 위시로 한 저예산, 저급 양산 영화만 찍던 그는 [[1970년대]] 후반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을 소재로 한 《[[족보(영화)|족보]]》를 시작으로 보다 한국적인 소재와 한국의 역사를 영화로 만드는 데 집중한다.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임권택의 포텐셜이 폭발한다. 그의 [[1981년]]작인 《[[만다라(영화)|만다라]]》는 대대적 호평을 받았고, [[1987년]]작 《[[씨받이(영화)|씨받이]]》는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감독상을 거두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후에도 [[1989년]]작 《[[아다다]]》와 《[[아제 아제 바라아제]]》 등이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외 [[칸 영화제]]에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가 초청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해외 영화제에도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젊은 감성에 맞는 청춘 하이틴 작품이 많이 개봉한 것도 이 시기이다. [[1980년대]] 청년문화를 주도한 [[최인호(작가)|최인호]] 소설가의 원작을 모티브로 한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영화)|고래사냥]]》, 《[[기쁜 우리 젊은 날]]》, 이두용 감독의 《[[돌아이]]》 등 당시 시대상의 파격을 달리는 신선한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1987년]] 이후에는 [[민주화]]에 힘입어 이념적으로 보다 자유로워지면서 이전까지는 금기시되었던 사회문제들을 다룬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다루던 영화는 주로 한국전쟁기 좌우익 대립, 군부 독재 시절 학생 운동, [[1980년대]] 급속한 도시 개발로 인한 [[빈부격차]]를 소재로 한다. 이 시기 활동하던 대표적인 영화감독은 [[박광수(영화 감독)|박광수]], [[장선우]], [[이명세]] 등이 있다[* 이 세 감독들의 초기 영화들은 후에 [[1996년]] 열린 제 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코리안 뉴 웨이브" 란 이름으로 지칭된다.]. 박광수 감독의 데뷔작인 《칠수와 만수》는 고도 성장 속에 소외된 가난한 계층들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주인공 중 한 명인 만수의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장선우는 [[1988년]] 개봉한 《[[성공시대]]》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지적했다. 비록 지금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으로 인해~~ 충무로에 재앙을 불러온~~ 한물 간 감독으로 취급받지만, 당시의 장선우 감독의 영화들은 흥행과 비평에서도 꽤 괜찮은 평가를 얻었다.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 작품들도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했다. [[1987년]] "장산곶매"라는 독립 영화 단체가 결성되었고, 이후 이들은 [[1989년]]작 《[[오! 꿈의 나라]]》라는 [[5.18 민주화운동]]을 직접적으로 다룬 독립영화를 제작하게 된다.[* 김태영 감독의 《[[칸트씨의 발표회]]》라는 독립 영화가 [[1987년]]에 간접적으로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바 있다.[[http://blog.naver.com/sega32x/150168163021|#]]] 또한, [[서울 올림픽]]의 그늘 속에 강제 철거 된 상계동 사람들을 다룬 "상계동 올림픽"이란 다큐멘터리도 올림픽이 일어난 같은 해인 [[1988년]]에 제작되었는데 바로 《송환》의 감독으로 유명한 김동원의 이름을 알린 작품이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금기시 되어왔던 사회 문제, 정부 정책의 비판과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성찰이 [[1980년대]] 말부터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비록 이 때만 하더라도 소규모 자본의 독립 영화 수준에 그쳤으나 서서히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영구와 땡칠이]]》, 《[[우뢰매]]》 같은 [[어린이 영화]]마저 선풍적인 히트를 쳤다. 그야말로 '새로운 물결'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시기였다. 하지만 새로운 장르의 도입이나 검열완화라는 점에 한해서 의의는 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꼭 그렇지는 못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한국영화시장이 매력적인 시장으로 받돋움하였고 때 마침 한국이 미국에 매년 수십억 달러 가량의 무역수지 흑자를 내었던 것도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쌍둥이 적자를 해결할 요령으로 동아시아 국가에 여러모로 압력을 가했다. 그러한 압력에 굴복하여 [[1987년]]에 할리우드 영화사 직배 허용을 하였고, 수입 쿼터제도도 대폭 완화하여 영화시장이 개방되다보니[* 그래도 스크린쿼터제는 유지되었기는 했다.] 한국영화 점유율이 곤두박질 쳤었다. [[1970년대]] 이래로 지속되온 영화산업 통제와 검열의 심화로 기본적인 경쟁력이 약회된 상황에서 시장보호조치로 점유율을 꾸억꾸억 유지하고 있던 상태였고 별다른 준비없이 바로 시장이 개방이 되다보니 할리우드 영화와 홍콩영화의 점유율도 급속히 올랐으며 반대로 국산영화의 점유율은 [[1987년]]에 40%가 붕괴한 이래로 지속해서 곤두박질 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